본문 바로가기

♤ 리더의 품격/리더의 서재

'데미안' 1/2 (44분)

반응형

데미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고작 1부 44분, 2부 37분이면 됩니다. (물론 눈으로 보시면 각 30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내로라하다'와 함께 30분 독서 출발해 볼까요?^^ 글에 등장하는 해당 음악은 관련 글 아래에 있습니다.

내용 듣기 1번. (20분) typecast.ai
내용 듣기 2번. (24분)

 

프롤로그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오래 된 옛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물론 그보다 훨씬 더 먼 옛날의 이야기까지 거슬러올라가야만 할지도 모른다.

  소설가들은 소설을 쓸 때 마치 자기가 전지전능한 신이나 된 듯이 어떤 한 인간의 일생을 샅샅이 꿰뚫어보고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든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펼쳐 놓곤 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소설가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설가라면 누구든지 자기의 작품이 소중하겠지만, 이제부터 하는 내 이야기는 내게는 특히 소중한 것이다. 그 까닭은 이것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이고, 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즉 단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인간의 이야기이자, 소설가가 머릿속에서 생각해 낸 인간, 이상적인 인간, 요컨대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보더라도 훨씬 더 무지하다. 

  현재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연의 귀중한 실험인 서로를 대량으로 학살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인생이 죽음과 함께 완전히 끝나 버리는 것이라면, 즉 한 알의 총탄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해 버린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그 인간 자신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현상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단 한 번 뿐인 방법으로 교차하는, 단 하나밖에 없는 매우 특수한 '점'이기도 하므로, 어떻게 되었든 흥미 깊고도 귀중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중요하고 영원하고 장엄한 것이며, 누구든지 인간은 살아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는 한은 훌륭한 존재이므로 행여 멸시를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모든 인간은 '정신'의 일시적인 모습이며 이 세상에 생을 부여받은 바의 고뇌의 한 예이므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모든 인간 속에서 되풀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단지 인간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보다 편안하게 죽어 가듯이,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편히 죽어 갈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길을 찾아 모색하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공상의 세계나 책 속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내 피가 내 마음 속에서 불러 일으키는 갖가지 교훈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읽어서 유쾌한 것도 아니고, 가공적인 이야기처럼 감미롭지도 않으며, 정연하게 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을 더 속이지 말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활이 모두 그러하듯, 나의 이야기도 부조리와 혼돈, 거기다 광기와 몽상의 맛까지 풍기고 있다.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 아니 그러한 길을 찾아 내려는 실험이며, 그러한 오솔길의 암시이다. 완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었던 사람은 이제까지 존재한 예가 없다. 하지만 의식하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구별은 있을지언정 누구나가 목표를 거기다 두고 힘껏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원시 시대의 점액과 껍질 등, 동물의 일원으로서 우리들의 출생에 붙어다니는 온갖 찌꺼기를 죽을 때까지 떨쳐낼 수가 없다. 끝내 인간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나 도마뱀, 개미 따위의 단계에서 그대로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머리는 사람이지만 몸뚱이는 물고기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근본을 따지면 모든 인간은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같은 신분의 존재이며, 모두 다 같은 심연(深淵)에서 나왔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실험이며, 심연에서 던져진 것인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 인간은 서로가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각자가 지니는 고유의 뜻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뿐인 것이다.

 

 

  데미안은 싯다르타, 니체, 프로이트, 심지어 융과 요가 인도 철학까지 이어지는 글이다. 즉, 헤르만 헤세를 이해하려면 동양철학도 알아야한다.

  그는 노자의 도덕경에도 심취할 정도로 동양과 동양사상에 관심이 있었고, 마치 고흐처럼 방랑벽도 있었다. 그의 사촌이 스님이 될 정도로 동양에 관한 이해가 깊은 집안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는 인도에 도착해서는 마치 고향에 온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데미안은 1차 대전이 끝나고 1919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이다. 이 책은 전후 세대의 불안함,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성경과 같은 존재였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정체성의 혼란과 심연의 고찰을 마치 내것처럼 받아들이는 조우는, 다수의 여론만 무의식적으로 안전하게 따라다녔던 그시대 젊은이들의 정처없던 자아를 붙들어 주었을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였던 아버지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독일에 가득한 개신교를 헤세에게 강요하지만 그럴수록 부정적 인식은 강해진다. 

  이책은 선과 악을 다룬 글 같기도 하고, 구도의 길을 가고자하는 글 같기도 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글 같기도 하다. 데미안은 친구이기도 하고 신이기도 하고 마치 처음부터 나 자신 같기도 하다. 

  간디, 바가바드 깃다의 경우 신을 인정하지만 인도의 요가에서는 아트만, 내부 자신의 신을 인정하고 자신과의 일치를 이루려고 한다. 그신은 여호와의 신은 아니다. 헤세가 인도와 동양철학에 심취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데미안은 외부의 신적인 존재라기 보다는 내부에 존재하는 자신의 신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데미안은 프롤로그가 모든 이야기의 끝이다. 뒤의 이야기는 단지 프롤로그를 길게 늘여놓은 것 뿐이다. 만약 프롤로그 만으로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면 더이상 책을 들출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면 뒷부분을 읽어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읽다가 이해가 안 되면 다시 프롤로그로 돌아오면 된다. 

  데미안은 독일어로 악령을 뜻하는 데몬이기도 하고, 세계의 창조자라고 불리는 데키우르크라도도 한다. 에바부인은 이브를 싱클레어는 우울한 시인을 베아트리체는 아름다운 여인을 카인과 아벨은 양면성을 각각 상징한다. 신이자 악마인 아브락사스, 선악의 구분을 강하게 교육하며 선함만 인정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헤세는 인간이 지닌 양면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선악을 동시에 지닌 인간을 인정하는 것은 인도 요가의 맥인 뿌르샤라는 창조주에서도 나타난다. 명상을 통해 신과 조우하고 선악을 지닌 오롯한 나를 만나는 명상의 시간을 그도 가졌을 것이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이성으로 나아가는 것'을 명상이라고 했고, 아프리카인이자 중세의 성인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명상은 신께 나아가는 것, 신의 은총'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신의 은총인 명상에서 만나는 선악은 본디 신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다. 

  불우한 세상 속에 던져진 헤세는 결국 독일이 싫어하는 책을 쓴 뒤 스스로 침잠하게 된다. 이때 그에게 융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세계로 발 들이게 되고 작가명을 숨긴채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출간한다. 물론 결국엔 들통나게 되고 세 번째 출간 때는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으로 책이 나오게 된다. 누군가는 의도적인 실험이었다고 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독자들이 많았던 사실 또한 무시하진 못했을 것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모리는 미국식 문화에 빠지지 말고 공동체를 추구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데미안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럼 지금부터 그 시대의 바이블을 만나보도록 하자. 

 

 

두 개의 세계

그 하나의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사실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였다. 이 세계의 대부분은 아주 친숙한 것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과 엄격, 모범과 가르침이 있었다. 이 세계 속에는 미래로 통하는 곧은 선과 길이 있었으며 의무와 죄, 옳지 못한 생각과 고해, 용서와 선량한 의도, 사랑과 존경, 성서의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생을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질서 있게 하기 위해 이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우리들의 집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세계였으며, 다른 냄새를 풍기고 다른 말씨를 사용하며 다른 약속과 요구를 했다. 이 두 번째의 세계에는 하녀와 직공들이 속해 있었는데 유령의 얘기와 소문으로 떠도는 스캔들이 있었다.

사방 어디에서나, 이 두 번째의 강렬한 세계가 모습을 나타내고 냄새를 풍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우리 방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것은 매우 좋았다. 암흑과 폭력이 존재하지만, 그 세계에서 우리가 한 달음으로 어머니에게 도망하여 올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장 신기한 일은 이 두 개의 세계가 그토록 가까운 이웃에 있고 그토록 가깝게 맞붙어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이 금지된 세계 속에 사는 것을 아주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금 밝은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것은 그토록 필요하고 좋은 일인지 모른다- 어쩐지 좀 더 아름답지 못한, 권태로운, 그리고 황량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누나들보다는 오히려 타락한 거리의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비밀이 있었다. 

나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시장의 아들과 산림관의 아들이 같은 반에 있었는데 그들이 가끔 내게 놀러오곤 했다. 다소 난폭한 소년들이었지만 선량하고 안정된 세계에 속해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늘 경멸하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인 우리보다 더 키가 크고, 힘도 세고, 거칠게 생긴 열세 살쯤 되어 보이는 초등학교 학생인 양복점 주인의 아들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아버지는 주정꾼이었고, 그의 온 가족은 평이 좋지 못했다.나는 이 프란츠 클로머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만났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벌써 어른 티를 냈고, 젊은 직공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흉내냈다.

나는 그의 무리 속에 끼어있는 것이 마음에 꺼림칙했다. 그것을 아버지가 아신다면 당장 교제를 끊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클로머에 대해 내가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나를 한몫 끼게 해서 다른 애들과 함께 취급해주는 것이 기쁘기도 했다. 그는 명령했고, 그것이 오래 된 관습인 듯이 우리는 명령에 따라 복종했다. 

나는 그들 속에 있어서는 이방인이었다. 그들에게는 나의 옷과 행동부터가 도전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클로머가 라틴어 학교 학생이며 양가집 자식인 나를 좋아할 리가 없었고, 다른 아이들도 때가 되면 곧 나를 배반하고 말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불안한 나머지 나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꾸며대기 시작했다.

보통 사과가 아닌, 라이네트와 황금빛 나는 파르메네와 같은 최고의 품종을 훔쳤다고 말했다. 클로머는 간계*에 찬 실눈을 뜨고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더니 위협하듯이 물었다. 간계1奸計: 간사하고 교활한 

"그게 정말이야?" "물론이지..."

"틀림없이 그런 짓을 했단 말이지?" "그럼, 사실이야."

"맹세할 수 있니?" "그래"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라고 말해 봐." "하나님의 이름으로..." "좋아"

그의 눈은 악의에 가득 차 있었고, 심술궂은 미소를 딘 그의 얼굴은 잔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임마, 그것이 누구네 것인지를 분명히 말해 주지.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사과를 도둑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리고 주인이, 누가 사과를 훔쳐 갔는지를 말해 주는 사람에게는 2마르크를 준다고 말한 것도 알고 있단 말야."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나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주머니 속을 뒤져 보았다. 할머니가 주신 시계를 꺼냈다.

그는 엷은 웃음을 띄면서 시계를 커다란 손으로 받았다. 나는 그 손을 보며 그 손이 나에게 얼마나 난폭하고 깊은 적의에 찬 것인가를 느꼈고, 얼마나 내 생애와 평화를 억세게 잡을 것인가를 느꼈다.

"은으로 된 거야..." "은 같은 건 문제도 아냐. 그리고 네 고물딱지 같은 시계로는 어림도 없어. 이건 네가 고쳐서 써보렴."

"너도 잘 알겠지만, 나는 2마르크를 벌 수 있어. 네가 알다시피 나는 그걸 마다할 부자는 아니란 말이야. 그렇지만 넌 부자야. 시계까지 있잖아. 나에게 2마르크만 주면 만사는 오케이야."

"나는 돈이 없는걸."

"나는 정말 돈이 없어. 그러나 그밖의 것은 뭐든지 줄게. 나는 인디언의 책과, 병정과 컴퍼스를 갖고 있어. 그걸 네게 갖다 줄게."

클로머는 건방지고 심술궂어 보이는 입을 씰룩거리더니 땅에 침을 뱉었다.

"수다떨지 마."

"그 따위 넝마쪽 같은 건 너나 가져. 컴퍼스라고? 내 비위를 더 거슬리지 말라고, 알아들었어? 그 돈만 내란 말야."

"너의 집에는 돈이 얼마든지 있잖아. 그건 네 사정이다. 그럼 내일 학교 끝난 뒤에 보자. 한 번 더 말하겠는데, 만약 안 가지고 오면..."

그는 무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한 번 침을 뱉고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나의 생활은 산산이 파괴되었다. 나는 깊은 죄의식에 빠져 물결 속에 가라앉았고, 모험과 범죄에 휘말려 들어갔고, 적에게 위협을 받았고, 위험과 불안과 치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와 양산, 좋고 훌륭한 사암으로 된 바닥, 현관 장롱 위의 그림, 안방에서 들려오는 누나들의 목소리, 이 모든 것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사랑스럽고 부드럽고 소중하게 여겨졌지만 더 이상 위안은 되지 못했으며 화실한 내 소유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엄한 질책일 뿐이었다. 나는 그 밝고 고요한 세계 속에 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카펫 위에 지워지지 않을 자욱을 남긴 더러운 발을 갖고 왔고 우리집의 세계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자를 가지고 왔다. 지금 나의 죄가 도둑질이건 거짓말이건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의 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나의 길은 지금부터 저 아래로,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는 무시무시한 확신을 느꼈다. 

방 안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내 젖은 신발에 대해 야단치신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쁜 일을 눈치채지 못하시고, 나는 또 속으로 그것을 더 나쁜 일과 관련시킴으로써 아버지의 비난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야릇한 새로운 감정이 내 마음 속에서 번쩍 떠올랐는데, 그것은 갈괴 같은, 반항으로 충만한, 심술궂은 예리한 감정이었다.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다니! 한동안 아버지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데 대해 일종의 경멸감을 느꼈고, 젖은 신발에 대한 꾸중은 나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일로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 전체의 경험 중에서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고 뒷날까지 남겨진 것이었다. 이것은 성스러운 아버지의 세계에 생긴 최초의 균열이었고, 나의 어린 시절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기둥에 가해진 최초의 톱질이었다. 그런 기둥은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하여서는 스스로 무너뜨려야 하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죽음을 맛보았다. 그 죽음의 맛은 씁쓰레했다. 왜냐하면 죽음은 탄생이고 새 삶에 대한 두려운 불안과 근심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달려오셔서 벌써 시간이 늦었다고 하시며 왜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 있느냐고 나무랐을 때 나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디 불편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만 토하고 말았다. 그것은 나를 학교에 가지 않게는 해주었으나 결코 11시에 시장에서 나를 기다리는 클로머로부터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나는 저금통을 털어서 그에게 주었고 아직도 1마르크 35페니히의 빚이 있었다. 그는 다음날 휘파람을 불면 가져오라고 하였고, 이후로 난 종종 그 휘파람 소리를 들었고, 줄곧 귀에 들여오는 것 같았다. 어떠한 장소에도, 놀 때도, 생각에 잠겨 있을 때도 이 휘파람 소리가 따라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소리에 나는 얽매였고, 그것은 이미 나의 운명이 되었다. 

 그 당시 돈도 없이 그 악마 앞에 나타나는 나를 그는 다른 방식으로 괴롭히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를 대신해서 심부름을 했고, 무언가 다른 어려운 일을 시키든가, 10분간 한쪽 발로만 뛰어가도록 하든가, 길가는 사람의 웃옷에 종이 조작을 붙이는 일을 명령받곤 했다. 우리 집안의 정돈된 평화로움 속에서 나는 마치 유령처럼 겁을 먹고 고통을 받으며 지냈으며, 그런 상태는 일종의 정신착란과 같은 것이었다. 다른 가족들의 생활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한 시간도 나를 잊고 지내질 못했다. 때때로 화를 내시며 나에게 따져 물으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나는 묵묵히 마음을 닫아 버리고 있었다.

 

 

카 인

나의 고민으로부터의 구원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부터 왔고, 그것과 더불어 새로운 일이 내 생활에 끼어들어 왔다.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내게 계속되고 있다. 

우리 라틴어 학교에 최근 한 학생이 전학해 왔다. 이 유별난 소년은 보기에는 아주 나이가 든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그가 어린 아이란 인상을 주지 않았다. 그는 놀이에도 끼어들지 않았으며 싸움을 하는 일도 없었다. 단지 선생님에 대한 자신 있고 확고한 그의 목소리가 다른 애들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막스 데미안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학과 공부를 하는 학생처럼 보이지 않고 그 자신의 문제를 추구하는 탐구자 같았다. 그는 나보다 우월했고 냉정했으며 그의 거동은 약이 오를 정도로 확고했다. 그는 모든 점에 있어서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아주 특이했고 개성적으로 여겨졌으며, 그것 때문에 그는 눈에 띄었다. 동시에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농부의 아이들 사이에서 그들과 같이 어울리려고 애쓰는, 변장한 왕자처럼 옷을 입었고 행동도 그러했다. 

어느날 그와 나는 같이 걸었고, 그는 갑자기 무엇인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이 웃었다. 

"참, 내가 아까 너희들 공부 시간에 같이 있었지."

그는 생기있게 웃었다.

"표적을 이마에 달고 다니는 카인 이야기였지? 그 이야기 네 마음에 들던?"

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 치고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데미안은 내 어깨를 쳤다.

"얘! 넌 나에게 조금도 거짓말할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수업 시간에 배우는 대부분의 다른 것들보다 주의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싸우다가 아우를 때려죽인다는 건 확실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후 그가 불안해지고 소심해진다는 것도 역시 가능하지. 그러나 그가 그의 비겁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을 겁주기 위해 표적까지 일부러 달았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이야기야."

"그는 힘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 했지. 그는 '표적'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우리들은 이것을 하고 싶은 대로 설명할 수가 있어. '인간'이란 항상 자기 형편에 맞도록 정당성을 주장하는 존재야. 사람들은 카인의 후예를 두려워해."

"용기와 특성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항상 겁나게 하거든. 두려움을 모르는 무서운 자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매우 불안한 일이야. 그래서 그들에게 복수하고, 자기들이 견디어 낸 공포를 조금이라도 보상받기 위해 그들에게 별명과 지어낸 이야기가 덧붙여진 거야. 알겠니?"

"알겠어. 그렇다면 카인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럼 성경 속의 이야긴 원래 사실이 아닌 거란 말이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어. 아주 오랜 옛날의 이야기일수록 사실에 가까워. 하지만 그 사실들이 언제나 사실대로 기록되고 그것이 반드시 옳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고는 볼 수 없어. 간단히 말해서 카인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려 죽였던 거야. 그게 정말로 자기 형제인지 아닌지는 의문이야. 그렇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결국 인간은 누구나 형제야."

카인은 고귀한 사람이고 아벨은 겁쟁이라니! 카인의 표적은 하나의 특성이라고! 그것은 불합리했고, 신을 모독하는 것이고, 사악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나님의 아벨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고, 아벨을 사랑하지 않으셨단 말인가? 아니, 그럴리가 없다. 데미안은 나를 조롱하고 함정에 빠뜨리기위해 유혹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굉장히 총명하고 말을 조리 있게 잘하긴 하지만.

집에와서 나는 다시 한 번 성서의 그 이야기가 씌어 있는 곳을 통독했는데 그것은 간단하고 분명해서, 거기서 어떤 특별한 주관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은 미친짓이었다. 나는 한순간, 아버지와 아버지의 밝은 세계와 예지를 한 번에 꿰뚫어 보고는 경멸했었다. 그렇다! 그 때 카인이 되어 표적을 가졌던 나 자신은 수치가 아니라 그것이 남보다 월등하다는 표시이고, 나는 사악함과 불행을 통하여 나의 아버지보다도 위대하고 착한 사람이나 경건한 사람들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단지 나를 괴롭히고 그러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나를 채워 주었던 감정과 이상하게 타오르는 흥분의 불길이었다.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카인, 고의적인 살인, 표적을 내포한 이 문제는 인식과 불평에 대한 나의 탐구에 있어서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프란츠 클로머와는 어쩔 수 없는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꿈 숙에선 가끔 클로머가 나를 학대하고 나에게 침을 뱉고 나를 짓눌렀고, 더욱 나쁜 것은 그가 나를 유혹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힘있는 영향력으로 억눌러서 무서운 범행을 저지르게 하는 그러한 꿈을 꾸었던 것이다. 

내가 반쯤 정신이 나가서 깨어난 가장 무서운 꿈은 나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발작적인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클로머가 갈아준 칼을 들고 죽이라고 명령한 대상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리고 깨어났다. 그동안 나는 비참하였지만 모든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고, 때때로 만사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나의 운명이 내 위에 덮여 있었고 그것을 깨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열한 살도 안된 어린애가 이렇게 느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의 감정의 일부분을 사상으로 바꿀 수 있는 어른들은 어린아이에게 이런 생각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경험까지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애에 있어서 그 당시처럼 그렇게 깊게 경험하고 괴로워한 적도 없었다. 

돈 대신 과자들 들고간 나를 클로머는 갈비뼈를 주먹으로 몇 차례 치더니 웃으며 과자를 받았다. 그리고는 다음에는 누나를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신호는 휘파람이었다. 절망적으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는 텅 빈 광정을 서성거렸다. 새로운 고민, 새로운 노예의 상태였다. 그때 시원스럽게 마음 속 깊은 데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놀라서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 손을 뒤에서 부드럽게 잡았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잡힌 대로 내버려두었다. 

"너였니?"

나는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나를 그렇게 놀라게 하다니!"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때만큼 그의 시건이, 어른이나 우월한 자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보는 자의 눈초리 같았던 적은 없었다. 오랫동안 서로 입을 떼지 않았다. 

"미안하다."

그는 다정하고 그러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놀랄 건 없잖아."

"그래, 그렇지만 놀랄 수도 있지."

"그럴는지도 몰라. 그러나 알아 둬, 네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까지 그렇게 위축된다면 '그 사람은 왜 그럴까'하고 생각하기 시작하지. 이상스러운 생각이 들고 호기심이 나거든. 그 사람은 네가 유별나게 놀라기를 잘 한다고 생각하고 사람은 누구나 불안을 가질 때만이 놀란다는 생각을 덧붙일 거야. 내 생각에 너는 본래부터 비겁한 자가 아니었지? 물론 영웅도 아니지만.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 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감정은 결코 가져선 안돼. 사람 앞에선 절대 두려움을 가져선 안돼. 넌 나를 두려워하지 않겠지. 어때?"

"아냐, 전혀 아냐."

"그것 봐! 그러나 네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제발 이젠 보내 줘, 날 도대체 어쩌려는 거야?"

"때때로 나는 사람들이 독심술이라 부르는 기술을 연구해. 그것은 마법은 아니야. 그렇지만 독심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독특하게 보이거든. 사람들을 아주 놀라게 할 수 있어."

"만약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에게 뜻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주었기 때문이야. 예를 들면, 나쁜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고 치자. 그러면 그는 너를 뜻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알겠니? 그건 분명한 일이 아니겠니?"

"아까 저쪽으로 사라진 녀석 이름이 뭔지 너는 알지?"

나는 몹시 놀랐고, 나의 침해당한 비밀이 내 속에서 고통스럼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밝은 세상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돼, 만일 네가 올바른 사람이 되려 한다면 넌 거기서 벗어나야 돼. 알아듣겠니?"

"너는 그놈에게서 벗어나야 돼! 만약 별다른 도리가 없다면 그를 죽여 버려!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나느 감명을 받게 되고, 내 마음에 들게 될 거야. 난 물론 너를 도울 테니까."

나는 새로운 불안에 싸였다. 카인의 이야기가 갑자기 다시 생각났다. 나는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너무 무시무시한 일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1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나와 데미안 사이엔 무언가 미래와 같은 희망과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나는 주일마다 비밀을 가지고 얼마나 지독하게 외로이 지냈던가 하는것을 알았다. 구제에 대한 예감이 강렬한 향기처럼 나를 향하여 날아왔다. 

클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우리 집 앞에서 들리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1주일이 지나도록 나는 감이 그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예기치 않을 때 갑자기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내 마음 속에는 늘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멀리 사라져 갔다!

어느때인가 그는 나를 보자 움찔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을 사납게 찡그리고 나를 피해 홱 돌아서 가 버렸다. 나의 적이 내 앞에서 도망쳤다. 나의 악마가 나를 두려워한 것이다! 기쁨과 경이가 내 몸을 휘감았다. 이 일을 해결해 준 데미안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 싸웠냐고 묻자

"아니, 난 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는 단지 너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와 이야기하고 그가 너를 편안히 놔두어야 그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가르쳐 주었을 뿐이야."라고 했다.

 내가 오늘날 확신하고 있는 바는 만일 그가 나를 클로머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않았다면, 나는 일생동안 병들고 타락했으리라는 것이다. 이 해방을 나는 그 당시 벌써 내 소년 시절의 가장 큰 경험으로 부터 느꼈다. 그러나 해방을 시켜 준 자가 그 기적을 달성하지마자 나는 그를 무시해 버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조력자, 구원자를 마찬가지로 빨리 잊으려고 했다는 것을 오늘날에 와서는 잘 이해할 수 있다. 저주받은 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클로머에게 당한 혐오스런 수모에서 상처를 입은 영혼이 모든 힘과 노력을 다해 이전의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던 세계로 도망쳐 돌아온 것이었다. 즉 다시 열린 실낙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로, 누나들에게로, 순수한 향기로, 신의 총애를 받는 아벨의 세계로...

마치 탕아의 귀향 축제 속에 묻힌 이야기를 아버지에게도 반복하자, 질문과 놀라움의 환호성이 몰려들었고, 부모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 간 압박감에서 해방된 한숨을 쉬셨다. 데미안은 절대로 이 세계에 속하지 않고 이 세계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유혹자이며, 나를 제2의 세계, 사악하고 나쁜 세계로 연결시켰다. 내가 클로머와 악마의 손으로부터 구제되었으나 그것은 나 자신의 힘과 행동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실제보다 더 어리고, 더 순종적이고, 더 어린애같이 행동했다. 클로머에 대한 종속을 새로운 종속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맹목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의 예속을, 옛날에 사랑하던 '밝은 세계'로의 예속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세계가 유일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이제야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장애가 많은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도 둑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 있는 세계 속에서는 숨어 있지 않을 수 없는 원시적 충동이 내 자신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해야 할 그런 나이가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처럼 나에게도 천천히 깨어나는 성에 대한 감정이 하나의 적으로서, 파괴자로서, 금지된 것으로서, 죄악으로서 습격해 왔다.

 나의 호기심이 찾은 것, 꿈과 쾌락, 불안이 나에게 창조해 준 것, 그리고 야릇한 사춘기의 비밀, 이런 것들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나의 소년 시절의 평화라는 행복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의 의식은 가정과 허용된 세계 속에서 살았고, 위로 훤히 밝아오는 새로운 세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모든 의식적인 불안한 생활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그 밑바닥 감정에 대한 꿈과 충동과 소망 속에서 살았다. 왜냐하면 나의 내부에서 소년의 세계는 붕괴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부모들처럼 나의 부모들도 또한 거기에 관해선 말한 바 없는 눈뜨는 생명력의 충동을 돕지 못했다. 부모님들은 단지 끊임없는 표정으로써 현실을 부정하고, 더욱 비현실적이 되는 소년 시절을 지속하려는 나의 가망 없는 노력을 도와 주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두운 세계', '다른 세계'가 다시 생겼다는 것이다. 일찍이 프란츠 클로머였던 것이 지금은 나 자신의 내부에 숨겨져 있었다.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본다. 그 속에는 여자의 얼굴과 같은 그 무엇이 있는 것 같고, 특히 잠시 동안은 이 얼굴은 나에게 어른 같지고 않고, 늙지도 젊지도 않고, 어떠면 천 살 먹은, 어쩌면 시간을 초월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경과에 의해서 도장 찍혀진 얼굴처럼 생각되었다. 

 클로머 사건 이후 나의 마음 속에 남아 있던 빚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신부님이 카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일종의 감동과 경고 같은 것을 느꼈고, 순간적으로 앞쪽 걸상의 옆으로부터 데미안의 얼굴이 밝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조소가 섞여 있었다. 

"너는 정말로 네가 원하는 바를 다른 사람이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니?"

"아니, 그런 일은 할 수 없어. 그러나 어떤 사람을 잘 관찰할 수는 있을 거야. 그러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제법 자세하게 말할 수가 있고, 그가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대부분 예측할 수도 있지. 그것은 아주 간단해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야."

"네가 어떤 사람을 아주 자세히 살펴본다면 너는 그 자신보다 그에 관해서 더 많이 알게 돼."

"그러면 의지는 어떻게 되지?"

"좋은 질문이야. 사람은 항상 물어야 되고 의심을 가져야 돼. 부나비는 자기가 무조건 가져야 하는 것만을 찾아. 바로 그럴 때에 믿을 수 없는 일까지도 달성할 수가 있지. 그들은 그들 외의 다른 동물들이 가지지 못한 불가사의 한 육감을 발달시키는 거야. 인간은 더 많은 활동 범위와 확실히 동물보다 더 많은 흥미를 갖고 있어. .. 그러나 그 소망이 나 자신 속에 잘 자리잡고, 사실로 나의 존재가 그 소망으로 충만되어 있을 때에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고 충분하고 강하게 원할 수 있어. 그런 경우라면 너의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명령을 시험하려고 하자마자, 그것은 성취될 것이고 너의 의지를 잘 훈련된 말을 다루듯이 구사할 수가 있어. 만약 내가 우리 신부님이 앞으로 안경을 더 이상 쓰지 못 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장난이야. 그러나 저 앞 내의자로 자리를 옮기려고 확고한 의지를 내가 가졌을 때는 그것은 아주 잘 되지. 그 땐 가을이었어. 그때 갑자기 알파벳 순으로 내 앞이 되는 그때까지 병을 앓고 있던 한 애가 나왔어. 누군가가 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므로 내가 그렇게 했지. 왜냐하면 내 의지가 곧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는 동안에 종교 문제에 관한 나의 신앙심에는 많은 틈이 생겼다.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들을 때엔 이 비밀에 가득 찬 세계의 어둡고 힘찬 고난의 광채가 모든 신비한 전율을 가지고 넘쳐흘렀다. 나는 오늘날도 이 음악 속에서 그리고 '비극의 행동(Actus tragicus)'속에서, 모든 시와 예술적 표현의 정수를 발견했다. 

마태수난곡 듣기 클릭하세요.

"구약과 신약 성서에서 보이는 이와 같은 완전은, 하나님은 훌륭한 현상이지만, 원래 하나님이 나타내야 되는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야. 하나님은 선한 것, 고귀한 것, 아버지와 같은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높고 감상적인 것이기도 하지, 아주 옳아! 그러나 세상은 다른 것으로도 구성되어 있어. 그런데 그것을 모두 악마의 세계로만 돌려 버렸기 때문에 세상의 그런 부분의 전체, 그 절반 전체가 은폐 당하고 또한 묵살되고 있어. 그들은 하나님을 생명의 아버지로서 찬양하면서 그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모든 성적 생활을 간단하게 묵살하고, 가능하면 악마의 것으로, 그리고 죄악으로 설명하고 있단 말이야! 나는 살망들이 이 여호와의 신을 숭배하는 것에 대해 아무 반대로 하지 않아, 추호도, 그러나 나는 우리는 모든 것을 숭배하고 마땅히 신성히해야 된다고 생각해. 단지 인위적으로 분리한 공인된 반쪽 세상뿐이 아니라 온 세상을!"

"그러니까 우리는 신에게 봉사함과 동시에 악마에게도 봉사해야 돼.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악마까지도 자기 속에 내포하고 있는 하나님을 창조해야 돼. 그 하나님 앞에선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런 일이 일어날 때 눈감을 필요가 없을 거야."

그는 그답지 않게 거의 격렬해졌으나 곧 다시 미소를 되찾고 더 이상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물론 무엇인가 확인해주고 행복하게 해 주었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책임과 더 이상 어린애일 수가 없고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소리가 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그 문제를 해결할 순 없어." 그는 나를 위로했다.

"너는 확실히 살인을 하거나 소녀를 강간해서는 안 돼. 그러나 사실 너는 아직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라 불리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데까진 이르지 못했어. 넌 이제 겨우 진리의 한 조각을 감지했을 뿐이야. .. 그러므로 '금지된 것'이 영원한 것은 아냐. 그것은 변할 수가 있어. ... 너무 게으른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거나 자기의 재판관이 되지 못하는데, 그런 사람은 이때까지 있어 온 것과 같은 금제에 복종하게 마련이지...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돼."

"약삭빠른 이야기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단지 자기 자신에게서 떠나갈 뿐이야. 자신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죄악이야. 사람은 거북이처럼 자기 자신 속으로 완전히 숨어 버릴 수 있어야 해."

 데미안의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두 눈은 꼼짝않고 내면으로 향해 있었고 아주 먼 곳으로 향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축 늘어지지 않았고, 감춰진 강인한 생명을 감싼 견고하고 질 좋은 껍질처럼 보였다. 이 광경이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는 죽었다, 라고 생각하고 거의 큰 소리로 말할 뻔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창백함. 이것이야말로 진짜 데미안이라고 느꼈다. 

 진짜의 데미안은 이처럼 무정하고 태고적이며, 동물 같고 돌같으며, 아름답고 차갑고, 죽어 있는 동시에 은밀히 이제까지 없었던 생명력으로 충만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주위를 이와 같은 적막한 공허와 고독한 죽음이 에워싸고 있었다. 지금 그는 완전히 자기 속으로 침잠해 버렸다.

 이때 모든 것은 변했다. 소년 시절은 내 주위에서 폐허가 되었다. 부모님은 나를 어쩐지 난처한 심정을 품고 바라다보았따. 누나들은 나에게 아주 낯설어졌다.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지금까지 익숙했던 감정과 기쁨은 왜곡되고 빛 바랜 것이 되었다. 정원은 향기가 없었고, 숲은 유혹하지 않았고, 세상은 내 주위에서 고물상처럼 김빠져 매력이 없었고, 책은 종이 조각이었고, 음악은 소음이었다. 가을날 나무 주위에 나뭇잎이 떨어져도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 나무 위에 비가 내리고, 햇볕과 서리가 내린다. 그리고 나무 속에서 생명은 서서히 맨 안쪽의 답답한 곳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러나 나무는 죽지 않는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Hermann-Hesse-Portal | Hermann Hesse

헤르만 헤세 포탈은 세계적인 명성과 인기를 누리고 있는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에게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이 포탈 사이트에 들어오시면 여러분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르만 헤세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 및 활동에 관한 온라인 정보를 가장 완벽하게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들어 가기… © Silver Hesse

www.hermann-hesse.de

데미안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 김성화역
출판 : 반니 2018.08.10
상세보기

논술 학원, 영어 학원, 수학 학원 에선 영혼을 살찌울 수 없습니다.

데미안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출판 : 지경사 2012.03.15
상세보기

구입하세요.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했습니다.

"어떤 책들은 맛보기 용이고 어떤 책들은 삼키기 용이며 몇몇 책들은 씹고 소화시키기 용이다. 즉, 어떤 책들은 일부만 읽으면 되고 어떤 책들은 다 읽되 호기심을 가질 필요는 없으며 몇몇 책들은 완전하고 충실하고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지금 읽으시는 글은 완전하고 충실하게 읽어야 할 글이나 1/3도 채 되지 않는 분량임을 알려드립니다.

데미안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출판 : 아이세움 2010.12.30
상세보기

'데미안' 2/2 (37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