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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의 품격/예술의 경계

민주주의는 너의 피를 먹고 자란다! '도시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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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아름다운 사람들 

 

원작 소개

도시의 얼굴들

도시 전문가가 들려주는 사람 이야기


2019 한국지역출판대상 천인독자상 대상 수상작


백석, 천상병, 나도향, 김해랑, 순종, 김수환, 김춘수, 이극로, 이원수,

김명시, 임화, 지하련, 옥기환, 김주열, 명도석, 산장의 여인...

 

20세기 초중반 60여년의 시간 

한반도 남녘 작은 항구도시에 남은

16인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도시 이야기!

 

건축가이자 도시 전문가인
허정도가 추적하고 재현하고 상상해낸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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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배경

1909년부터 1979년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1909년 ◈ 구한말(舊韓末) 경술국치 1년 전

1919년 ◈ 3·1운동

1929년 ◈ 상해 임시정부

1938년 ◈ 중일전쟁

1949년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60년 ◈ 3·15 의거

1979년 ◈ 부마민주항쟁

 

'도시의 얼굴들' 소책자(팸플릿)

 

2022년 지역 배우들로만 출연해 뮤지컬로 재탄생한 '도시의 얼굴들', 뮤지컬 넘버

 

 

시놉시스

1979년, 서울에서 온 신문기자 '원석'은

식당 마산집을 방문해 '털보'라는 사람의 행방을 묻는데,

마산집 주인 '영희'는 어쩐지 대답을 꺼린다.

그때, 이들의 대화를 들은 '영희'의 80대 노모 '순애'가 

자신이 털보를 알고 있다고 말한다.

 

현재 치매를 앓고 있는 '순애'는

어릴 적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춘석'의 아들인 '원석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털오놓기 시작하는데...

 

13살의 어린 '순애'와 '춘석'

그리고 소년 의병 '털보'가 그려내는 삶의 길을 따라,

1909년부터 1979년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 동안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이야기.

 

그들이 머물고 스쳤던 시간과 장소에 관한

아주 평범하지만 평범할 수 없었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역사를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Production Credit

원작 : 허정도

총괄프로듀서 임웅균 | 창원문화재단 대표이사

극작 성종완 | 대표작 뮤지컬<사의 찬미>, <비스티 보이즈>

각색 손상민 | 대표작 도서<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예술감독 천영훈 | 대표작 연극<나락모티 사람들(오데로 가꼬?)>

작곡 허수현 | 대표작 뮤지컬<루드윅>, <친정엄마>, <사랑은 비를 타고>

연출 문종근 | 대표적 뮤지컬<삼월의 그들>, <파란>, <햄릿>

조연출 윤미경, 기획 장소영, 액팅감독 김소정

음악감독 : 최햇살, 안무 김현주·김병진

 

2022년 연극 영상이 없어서 2021년 작품으로 대체합니다.

 

뮤지컬 '도시의 얼굴들'은

'창원시 마산지역'을 거쳐 간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그들이 머물고 스쳤던 시간과 장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022년 연극은 뮤지컬로 바뀌면서 첫장면이 다릅니다.

군인들의 칼군무가 압권인데 실을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1장 1979년

경남대학교 근처의 식당 마산집

마산 식당 주인 '영희'가 아구찜 안주를 내놓으며 손님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각박한 세상을 바꾸려면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며 소리치던 중

마치 순사인 듯한 사내(원석)가 갑작스레 등장한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대통령을 욕하면 잡혀가던 시대이다.

*영상 참고 : 1979년 10월 26일은  대한민국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내가 털보가 있는 곳을 잘 알재

서울에서 온 사내는 '원석'이라는 기자인데, 순애(할머니)와 친구였던 '춘석'의 아들이다.

그는 '털보'라는 사내를 취재하기 위해 마산으로 내려왔다.

잘 모른다며 답을 꺼리는 영희와 달리 순애는 털보와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한다.

 

2장 1909년 

마산거리

춘석 : 우리가 비밀 의병이라꼬?

13살 나이에 비밀 의병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의병들을 도운 어린 순애와 춘식

조또마때 조또마때

의병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일본 순사를 만나는 위기에 처한다.

뭔가 못마땅한 춘석

둘은 '털보'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첫눈에 반한 순애는 '털보'의 이름과 나이를 묻지만,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떠나버린다.

추억에 잠겨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순애

 

3장 1919년

마산의 어느 아지트

태극기를 구해온 춘석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는 23살의 순애와 춘석

*1919년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로, '기미독립선언서'라고도 한다. 당시 청원서 형식으로 발표하기로 하였지만 청원서는 일본 정부에 독립을 요청하는 것이라 민족 자결의 의미가 없고, 독립 의지 및 당위성을 표명하기에는 선언서 형식이 적합하다는 최린의 의견에 따라 선언서로 발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3·1 독립선언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온 독립운동가를 도운 남자는 다름 아닌 '털보'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순애와 춘석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이 선언은 오천 년 동안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려는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우리 민족이 수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받은 지 십 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며, 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이 얼마인가.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받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아, 그동안 쌓인 억울함을 떨쳐 내고 지금의 고통을 벗어던지려면, 앞으로 닥쳐올 위협을 없애 버리고 억눌린 민족의 양심과 사라진 국가 정의를 다시 일으키려면, 사람들이 저마다 인격을 발달시키고 우리 가여운 자녀에게 고통스러운 유산 대신 완전한 행복을 주려면,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이천만 조선인은 저마다 가슴에 칼을 품었다. 모든 인류와 시대의 양심은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방패가 되어 우리를 지켜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아가 싸우면 어떤 강한 적도 꺾을 수 있고, 설령 물러난다 해도 이루려 한다면 어떤 뜻도 펼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이 1876년 강화도조약 뒤에 갖가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을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 문화 민족을 야만인 대하듯 하며 우리의 오랜 사회와 민족의 훌륭한 심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남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이 바라지 않았던 조선과 일본의 강제 병합이 만든 결과를 보라. 일본이 우리를 억누르고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따라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이 생겨나고 있다. 과감하게 오랜 잘못을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사이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이, 서로 재앙을 피하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울분과 원한에 사무친 이천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동양의 안전과 위기를 판가름하는 중심인 사억만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또 중국이 일본에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 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 어찌 사소한 감정의 문제인가!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새봄이 온 세상에 다가와 모든 생명을 다시 살려 내는구나. 꽁꽁 언 얼음과 차디찬 눈보라에 숨 막혔던 한 시대가 가고,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볕에 기운이 돋는 새 시대가 오는구나.  
   
온 세상의 도리가 다시 살아나는 지금, 세계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우리는 원래부터 지닌 자유권을 지켜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양심이 나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나와 함께 나아간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즐겁고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다. 수천 년 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우리를 지켜 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뿐이다.  

세 가지 약속

하나, 
오늘 우리의 독립 선언은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로운 정신을 드날릴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을 세운 지 4252년 3월 1일(1919년 3월 1일)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네이버 지식백과] 3·1 독립선언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평화롭던 독립선언서 낭독 분위기는 일본 순사들에 의해 순식간에 전쟁터를 방불케한다.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순애를 구하러 온 의병대장 '털보'
털보와 순애

사랑하는 '털보'를 두고 떠나려니 순애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일본 순사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털보

 

4장 1929년

마산 노동야학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열정을 이어간다.

학생, 춘석, 이원수, 순애

야학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며 혼담이 오가기도 하는 춘석와 순애

이날은 고향의 봄*을 지은 19살의 '이원수'가 방문했다.

고향의 봄 - 이원수 시, 홍난파 곡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 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는 나도향 시인의 시 한 편을 읊는다.

나도향 시인이 마산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피 묻은 편지 몇 쪽》 의 단 몇 줄. 그것이 마산에 간 이유 전부였다.

“마산의 바다는 참 좋습니다. 바다의 공기를 마시고 그것을 내뿜을 때면, 마치 바다를 삼켰다가 배앝는 듯한 때가 있읍니다. 구마산(舊馬山) 지저분한 부두에 섰을 때라도 바다를 내다 볼 때, 멀리서 흰 돛을 단 배가 유리 같은 바다 위로 미끄러져 갈 때에는 돛대 끝에 내 맘 한 끝을 매고 한없이 먼 나라로 나의 마음을 끌어가는 듯합니다.”

자네 둘은 처녀 총각으로 늙어죽을텐가?

마산의 독립운동가인 '옥기환'과 '명도석'은 춘석과 순애의 결혼을 은근슬쩍 보채기도 하고,

어린 이원수를 흡족하게 추켜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길잡이가 돼 줄 사람인 '털보'가 마산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순애는

헐레벌떡 그에게 달려간다.

사랑하지만 함께하기 힘든 운명에 처한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춘석의 운명도 얄궂다

지켜주지도 못할 여인을 사랑하는 털보도 밉고, 그보다 먼저 만나서 사랑했던 자신의 처지도 억울하다.

남은 춘석을 바라보는 순애와 아들 원석

춘석이 간직했던 33살의 연정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5장 1938년

마산 어시장의 한 식당

지하련과 영희

어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하는 순애집에 찾아온 지하련*이 순애딸 영희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인 지하련은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마산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 부유한 집안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근대문학사에서 신변소설 혹은 심리소설을 써서 독특한 문학적 개성을 보여주었다.  

1936년 카프 출신 문학이론가 임화*와 결혼하였고, 1940년 문학평론가 백철의 추천으로 〈결별〉을 《문장》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결별〉을 포함해 〈체향초(滯鄕抄)〉(1941), 〈가을〉(1941), 〈산길〉(1942), 〈도정(道程)〉(1946), 〈광나루〉(1947), 〈종매(從妹)〉(1948), 〈양〉(1948) 을 발표하여,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광복 후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인 《문학》 창간호에 발표한 〈도정(道程)〉으로 이 단체에서 선정한 제1회 조선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지식인이 계급 의식을 깨닫고 실천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섬세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1947년 임화와 함께 월북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만주에 피난차 머물고 있다가, 1953년 박헌영 계열이 몰락하면서 임화도 미제 간첩 혐의로 처형당했다. 이후 1960년경 지하련도 사망하였다.
임화는 한성부의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이상, 이강국과는 보성고보 동기생이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 창작과 비평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무렵 친구인 윤기정과 함께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임화라는 필명은 1927년 경부터 계급문학에 관심을 보이며 쓰기 시작했다. 1929년에 시 〈우리 옵바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하여 대표적인 경향파 시인으로 자리를 잡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永男[영남]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火[화]젓가락만이 불쌍한 永男[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卷煙[궐련]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永男[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 ─ 가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연기에 싸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永男[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製糸機[제사기]를 떠나서 백 장에 일전짜리 封筒[봉통]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永男[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封筒[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永男[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火[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永男[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永男[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永男[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오빠 생각 노래를 부르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를 떠올렸을 영희

오빠생각 이라는 노래를 불러보라는 말에 영희는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힘든 환경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아빠도 모르는 순애의 딸 영희를 애잔하게 바라보는 춘석

순애을 떠나보낸 뒤 춘석은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다.

힘들게 사는 순애가 보기 딱해 돈봉투를 놓고 가는 춘석

영희도 아빠가 늘 보고싶었다

왜 아빠 얘기를 떳떳하게 하지 못하냐며 야단치는 순애

 

6장 1979년

마산집

순애의 시간은 돌고돌아 다시 마산 식당으로 왔다.

갑작스런 휴교령에 학생들은 집에 가지 않았다.

경남대 앞 마산식당에서는 부마 민주항쟁*의 불씨가 붙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닷새간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회원구)에서 일어난 '시민 항쟁'이다.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를 끝내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냈으며 '4·19, 5·18, 6·10 항쟁'과 함께 '4대 민주화운동'으로 불린다.

아들이 무서워하자 할아버지(털보) 손주답게 용기있게 나서라고 다그치는 '영희'

미안합니다. 이런 세상을 물려줘서...

손주에게 살기 힘든 세상을 물려줘서 미안하다고 비는 '순애'

괜찮아요. 할머니. 이제 저희들이 바꿀게요.

 

 

7장 1949년

마산 경찰서

일제의 앞잡이가 된 마을 친구에게 고문을 당하는 털보

마을 어르신과 함께 털보를 보게해달라고 찾아온 순애

시대가 만든 피해자들이 서로를 죽일 듯 쳐다보고 있다. 

그때 등장한 춘석

힘을 가져야 살 수 있는 세상이라 힘을 가졌다.

그런 춘석을 욕하는 순애

하지만 털보의 목숨을 구걸하며 춘석 앞에 무릎 꿇는다.

 

8장 1960년

불종거리

1960년 마산 3·15 의거일

순애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한다. 

여보! 여보!!

자유당 정권의 투표 부정에 반발한 학생과 시민들이

부정선거,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에 나서자

경찰은 최루탄과 총기로 무차별 발포를 가하면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4월 11일, 얼굴에 최루탄이 꽂힌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분노한 마산 시민의 2차 시위가 발발하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물위로 떠오른 김주열 학생의 시신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좌익 폭동이라고 발표하면서

마산 시민들의 반발은 더욱 고조된다.

외치고

발악하고

짓밟고

떠올리고

울부짓고

그렇게 떠나보냈다.

남성동 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

또는 남성동 파출소에서 북마산 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

너는 보았는가 뿌린 핏방울을

베꼬니아의 꽃잎어럼 선연했던 것을

1960년 3월 15일

너는 보았는가 야음을 뚫고 나의 고막도 뚫고 간

그 많은 총탄의 행방을

- 김춘수 -

 

9장 1979년

마산 3·15 의거탑

  3·15 마산 의거(三一五馬山義擧)는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시위이며,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 행위에해 대항해 의롭게 거사를 했다는 뜻에서 3·15 의거라고도 부른다. 3·15 마산 의거는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3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3.15 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을 의결하고, 3월 12일에 공포하였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지역 배우들로만 구성해

뮤지컬로 재탄생한 연극 '도시의 얼굴들'

뮤지컬이 끝나자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엄청난 함성소리가 들렸다.

중간중간 감동적인 노래끝에 나오는 대사 타이밍 때문에 박수를 참아서 였을까?

아니면 우리 주변의 이야기라서 였을까? 

그도 아니라면 2시간이라는 긴 시간 내내

젖었다 말랐다 하며 안과 의사도 못 고친

건조한 현대인의 눈물샘을

드디어 고쳐낸 고마움 때문이었을까?

 

노랫소리와 함성이 아직 귓가에 선연하다.


 

2022년 커튼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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