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하신 후 외가인 평안남도 평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외조부는 평양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사업이 아주 번창하여, 어릴 때부터 어려움은 전혀 모르고 편안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고등과정)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아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이중섭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작품을 제출하게 되는데 오산학교 시절 민족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작품의 주제를 황소로 잡고 황소를 소묘하는 작품으로 참가하게 됩니다. 당시 황소는 한국의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동물이라 소에 관련된 표현을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는 보란듯이 작품을 그려내는 강단이 있었습니다.
첫 작품을 전시할 때는 비교적 그림 크기를 크게 그려 내는 기조를 알면서도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를 그린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이중섭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특히 소 그림의 낙관에 '중섭'이 아닌 '둥섭'이라고 씌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친일파로 변절한 조선인 문학가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게재한 〈머리를 중처럼 밀고 전쟁에 참가하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자〉라는 논조의 사설을 보고 중섭의 본인 이름에 발음이 같은 중자도 부르기 싫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분노하여 낙관의 이름을 '중'에서 '둥'으로 바꿉니다.
1936년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 학교(현재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1937년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학풍을 중시하는 도쿄 분카 학원(문화학원)으로 옮겨서 공부합니다. 그곳에서 평생의 연인인 마사코를 만나게 됩니다. 1941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조선인 화가인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朝鮮新美術家協會)를 결성했고, 1943년에는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합니다.
1945년 고향에 돌아온 뒤 5월에 원산에서 연인이었던 이남덕{李南德, 본명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과 결혼합니다. 아름다운 5월의 신부가 되셨네요.^^
1946년에는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했지만 1주일 만에 사직했습니다. 같은 해에는 그의 친구인 구상 등이 펴낸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 제작을 맡았지만 《응향》이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인 작품으로 규정된 필화 사건인 응향 사건에 연루되기도 합니다.
1950년 한국 전쟁 때 월남해서 경상남도 부산, 통영, 제주도 등을 다니면서 살게됩니다. 통영에서 지낼 때 이중섭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힘든 일생 중 그나마 가장 편안하고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진 시기였습니다. 통영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있지요.
가족들이 떠난 이유는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결국 1952년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게됩니다. 가족이 너무나도 그리웠던 그는 1953년 평생에 딱 한 번 부두 노동으로 번 돈을 털어 일본을 다녀옵니다. 그러나 선원증을 갖고 있던 이중섭은 일본에 오래 체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주일 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합니다.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서도 창작에 매달리던 그는 결국 1956년 9월 6일 40대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둡니다. 새하얀 병실에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렸던 아이들의 그림들이 아래에 있습니다. 종이가 없어서 정말 자그마한 그림들이지요. 그의 화풍이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의 형체가 점점 흐려지는 것은 아마도 헤어진 시간이 길었던 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의 그림을 사러간 어느날 그는 고작 작은 그림 한 점을 팔면서도 뭐가 그리 죄송한지 다시 나중에 잘 그려서 바꿔드리겠다며 머릴 숙이던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그에게 이딴 억대급의 그림이 이제와 보상이 될진 모르겠지만, 화가의 죽음과 사연을 기다리는 분들이 있다면 그러지 마시고 현재 열심히 작업하시는 젊은 작가분들의 그림들도 많이 구입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위키 백과 일부 인용 및 사실에 기반한 각색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타 사진 및 그림의 출처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작품이 있다면 댓글 주시기 바랍니다.)
1. 소 47억
2. 싸우는 소 14.5억
3. 호박꽃 13.5억
4. 아버지와 장난치는 두 아들 5.5억
5. 무제(양면화) 3.8억
6. 돌아오지 않는 강 3억
7. 노란 태양과 가족 3억
8. 큰 게와 아이들 / 달과 게(양면화) 2.6억
9. 두 아이와 비둘기 2.5억
10. 사계 2.1억
어떤가요?
이중섭 화가의 예술가적 고뇌가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우리네 아버지의 삶처럼 따스하고 고단하게 느껴지시나요?
박수근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현 양구읍) 정림리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납니다. 가난은 그에게 좋은 미술 교육을 제공하지 않았고 미술 재료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가난으로 중학교에 진학도 못 했으니 2살 아래의 이중섭 작가의 어린시절과는 참 대조적입니다. 그는 강원도 양구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강원도 인제군에서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였고, 유일한 대회인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등장하게 됩니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 미술협회전람회에서 입상하였고, 1958년 이후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조선일보사 초대전·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 차례 참가합니다. 1959년에 제8회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면서도 한국적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충실하게 다루었고, 한국인 화가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평범한 한국의 서민상을 주제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캔버스 대신 종이 위에 아주 작은 작품을 그리면서 자신의 예술적 의지와 혼을 담아냈는데, 당시에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그의 소품들은 날이 갈수록 제 빛을 발하여 오늘날에는 마치 지난 시절 잃어버린 보석처럼 빛나면서 한국인들은 그를 ‘우리의 화가’, ‘국민화가’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국민화가로 불리는 박수근의 이력서는 아주 초라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개인전 한번 열어보지 못하고 1965년 5월 6일, 51세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방 도시로 내려가 부두노동자를 하기도 하였고 미군 PX에서 미군 병사들이 기념품으로 만들어가는 ‘손수건 위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그의 삶은 한국의 유명한 소설가 박완서가 <벌거벗은 나무>라는 소설에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박수근에게는 아무런 일거리가 없었다. 그는 도시 빈민에 불과했다. 그의 유일한 수입원은 반도호텔 내에 있는 당시 유일한 갤러리인 반도화랑에서 이따금 팔아준 그림 값이 전부였다. 당시 그의 그림 값은 30 달러 정도였고 한국의 국민소득은 개인당 70달러였다. 미술품 거래라는 것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박수근의 작품은 특히 외국인들이 좋아하여 간간히 팔리곤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소품인데다 값이 저렴하였고 무엇보다도 한국적인 서정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외국인 중에 주한 미국 외교관의 부인인 마가렛 밀러 여사는 박수근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녀는 박수근의 그림을 수십 점 소장하였고 다른 외교관 부인들과 함께 아뜰리에 탐방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의 낡고 허름한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귀국 후에도 편지로 박수근의 그림을 구입해 주었다. 이렇게 그녀가 미국에서 작품을 구입해 주면 박수근은 그림 값 대신 그림물감을 사서 보내 줄 것을 부탁하곤 하였다. 지금 그의 고향인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 소장된 밀러 여사의 편지를 보면 가난한 화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애틋하게 남아 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다시 열리기 시작한 국가 공모전에 출품하여 <우물가>가 특선되고 <노상에서>가 입선을 하면서 화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절구질하는 여인>이 입선되고, 그 이듬해에는 <두 여인>이 국회 문공위원장 상을 수상하는 등 화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다져갔다.
그러나 1957년, 43세 때 모처럼 1백호의 대작을 그려 출품한 것이 낙선되자 크게 실망하고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폭음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오늘의 시점에서는 이해되기 쉽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국전을 통한 미술활동이 화가 이력의 전부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박수근의 상심은 그렇게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국전 출품을 포기하고 그림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에는 추천작가로 초대되었고 62년에는 심사위원을 맡으면서 화단에서 명예를 회복했다.
그는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절구질하는 여인>. 박수근은 또 아이들의 천진스런 모습도 즐겨 그렸다. <동생을 업고 있는 언니>, <독서하는 소녀>. 그러나 그는 남자를 그릴 때면 늘 <쉬고 있는 남자>를 그리곤 했다. 사실 이런 대상들은 그가 살아가면서 늘상 대하던 도회지 풍경들이었다.
박수근은 이런 서민들의 일상적 모습(everybody's everyday life)을 어떤 누구와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사실주의도 낭만주의도 인상주의도 표현주의도 아닌 박수근만의 형식이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대상들이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그 인물들이 있는 그대로 화면 속에 고착되어 있기를 원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고 애정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화면을 아주 두텁고 거친 마티엘 기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대상들은 한결같이 이 거친 마티엘 속에 가늘고 굵은 검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하여 그가 묘사한 인물들은 화면 속에 고착되어 있는 암각화 같은 느낌을 준다.
박수근 예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밀러 여사는 귀국 후 그의 예술세계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65년에 한 잡지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 화가, 박수근>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녀는 박수근이 어떻게 이 두터운 마티엘 효과를 나타냈는지를 화가에게 직접 들은 대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그림제작에 있어서 붓과 나이프를 함께 사용한다. 캔버스 위의 첫 번째 층을 충분히 기름에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으로 바르고 이것을 말린다. 그 다음에 틈 사이사이의 각 층을 말리면서 층 위에 층을 만든 것이다. 맨 위의 표면은 물감을 섞은 매우 적은 양의 기름을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은 갈라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과감하게 검은 윤곽선을 이용하여 대상을 스케치 넣는다.” 이것이 박수근의 독특한 조형어법이고 서양의 어느 화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개성으로 되었다.
이 마티엘 기법을 통하여 그가 얻어낸 예술적 효과는 마치 한국의 산천에 즐비한 화강암 암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처럼 그 대상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거기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다만 거기에 묘사된 대상이 부처가 아니라 정직하고 순박하고 꾸밈없이 살아가는 서민의 모습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박수근은 겨울나무도 즐겨 그렸다. 그 나무 또한 특별한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산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전형적인 -인물로 치면 서민적인- 나무이다. 그리고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면서 새 봄을 기다리는 벌거벗은 나무들이다. 이 또한 그의 인물화에서 보여준 예술적 내용과 다르지 않다. 즉 현재의 삶은 힘들어도 묵묵히 견디면서 희망을 잃지 않은 그런 나무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다.
지난 1세기 동안 한국 화가들이 서양미술의 기법과 정신을 맹목적으로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이 새로운 조형어법을 익히면서 서양미술사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독창적이고 감동적인 그림 세계를 이룩한 화가도 적지 않다. 그 중 대표적인 화가가 박수근이며 한국인들은 우리 현대미술에서 이런 훌륭한 화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박수근이 이룩한 예술적 성과를 서양미술사의 흐름에서 어느 사조에 해당하는가를 따져 본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는 시대사조의 경향에 개의치 않고 오직 자신이 독창적인 그림 세계를 실현해 갔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양 사조를 열심히 따랐던 동시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문학가 괴테가 일찍이 말했던 유명한 정의,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박수근의 예술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국민화가 유홍준(미술평론가/명지대 교수)의 평론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마티에르(흙 느낌의 두꺼운 질감)의 독보적 화풍을 만든 '박수근'은 앤디 워홀에 견줄 수 있을만한 화가로 그를 빼놓고 한국의 5~60년대를 말할 수 없습니다.
40세에 등단한 박완서 작가의 처녀작 '나목', 그리고 박수근 화백의 그림
1. 앉아있는 소녀 19억5,923만
2. 목련 16억 4,530만 5천
3. Under Trees 10억 5천만
4. 아이 업은 소녀 9.5억
5. 모자 8.3억
6. 나무와 두 여인 8억
7. 고목과 아이들 7억 2,936만
8. 귀로 6.8억
9. 앉아있는 여인 5.8억
10. 집골목 (창신동 풍경) 5.3억
홍익대가 왜 실기를 없앴는지 아시겠지요.
김환기
김환기(金煥基, 1913년 4월 3일 ~ 1974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한국의 미술품 경매의 신기록을 쓰고있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수화(樹話)이고,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출생이다.
1936년 일본 니혼 대학 미술학부를 마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에 출품했다.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1952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 1954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엠베지트 화랑을 위시하여 1957년 파리·니스·브뤼셀 등에서 계속 개인전을 가졌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초대 예술원 회원·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어 브라질로 갔고, 동 국제전의 명예상을 받았으며, 그곳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1964년 이후 부인인 수필가 김향안(金鄕岸, 본명 변동림)과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 중 그곳에서 사망했다.
2015년 김환기의 1971년작 작품 <19-Ⅶ-71#209>은 서울옥션 홍콩 경매서 한화 47억 2100만원 (31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고, 이로써 이전의 최고가로 남아있던 박수근의 <빨래터>를 제치고 국내 작가 미술품 경매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2019년 11월 23일 김환기의 1971년작 작품은 크리스티 홍콩 경매서 한화 132억 3600만원 (8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고, 한국 미술품 중 최초로 한화 100억을 넘긴 작품이 되었다.
한국의 서양화가로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화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였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김환기는 추상 계열에서 벗어나 구상을 추구하면서도 오히려 조형수단의 자율적인 표현을 추구했다. 또한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면, 선, 형태, 색체, 리듬 등으로 대상을 조형적으로 새롭게 표현했다.
(위키 백과 중 일부)
1. 우주 (Universe 5-IV-71 #200) 131억 8,750만원
2. 03-II-72 #220(1972) 85.3억
3. untitled(1971) 72억
4. 고요(Tranquility) 5-IV-73 #310’(1973) 65.5억
5. ‘12-V-70 #172’ 1970 63억 2,600만
6. 무제 27-Ⅶ-72 #228 (1972) 54억
7. 무제 1970 48억 6,750만
8. 19-Ⅶ-71 #209. 1971. 47억 2,100만
9. '무제 3-V-71 #203'(1971) 45.6억
10. 항아리 39.3억
이상으로 '내로라하다'의 물욕이 꿈틀거린 시간
'내욕망과순수사이'였습니다.
참고한 사이트입니다. 더욱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면 아래의 사이트를 찾아가 보세요.
'♤ 리더의 품격 > 예술의 경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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