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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의 품격/주식과 경제

주식 100년 역사로 고증한 '코로나19, 코스피, 세계 주가'의 향후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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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에드워드 카아

 

'그렇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다.'

 

 

코로나19(covid-19)로 전세계 주식 시장이 패닉에 빠져있다. 유명무실한 WHO는 전염병의 최고 경보 단계인 6등급 팬데믹(Pandemic) 선언을 공포하여 주식시장 공포에 적극 기여하는 무명했으면 하는 유실한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과거 주식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지금의 사태가 어떤 흐름을 보이게 될 지 예측해 보도록 하겠다. 사실 예측이라기 보단 과거의 답습일 뿐이겠지만...

 

1. 1929. 대공황(Depression of 1929)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겉으로 보이는 경제적 번영과 달리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만성적 과잉 생산과 실업 문제를 지니고 있었고, 이는 결국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의 '뉴욕주식거래소' 주가 대폭락(검은 화요일)으로 나타났다. 그 여파가 10년 동안 이어졌기에 대공황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수많은 기업의 부도로 1933년에는 전체 근로자의 30%인 1,500만 명이 실업자가 되기에 이른다. 미국의 공황은 가장 큰 피해를 본 독일을 비롯해 유럽에까지 금융 공황을 발생시켰고, 이에 영국은 1931년 9월 금본위제(순금 1온스=391.20달러(1993년)라는 식으로 통화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연계(連繫)시키는 화폐제도)를 정지시켰고, 미국도 1933년에 이를 따른다. 이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경기를 회복하게 되었고, 대전 중에는 실질소득이 2배 정도 증가하기도 하였다.

수정 자본주의라는 공황대책을 내세운 미국은 뉴딜 정책영국과 프랑스는 블록경제(식민지 확보)를, 전체주의를 내세운 독일은 나치스 독재, 이탈리아는 파시즘 독재, 일본은 군부 독재를 내세우며 공황을 벗어나려한다. (독재나 전체주의는 가장 빠르게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길인 모양이다.)

 

 

2. 1956. 한국 주식 출범

 

실질적 주식 거래는 일제 강점기 때 있었지만 현대적 형태의 증권거래소 등장은 1956년 3월 3일, 당시 재무부의 주도로 설립된 대한증권거래소이다. 고작 12개사에 불과했던 주식시장은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 자금조달 수단으로 증시 육성 정책을 펼치고, 1972년 '기업공개 촉진법'이 발효된 6년 뒤에는 356개사로 늘어났다. 주식거래대금 또한 4백억원 대에서 1조원 대로 40배 이상 늘어났다. (이후 1950 국채파동, 62년 증권파동)

 

3. 1973. 1978. 오일 쇼크

 

오일 쇼크란 원유 값이 급등하여 전 세계 각국에 경제적 타격을 준 석유파동으로, 제1차 석유파동은 1973년 10월 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이 10월 17일부터 석유전쟁으로 비화된 사건이다. 그리고 1978년 잠시 진정되었던 석유파동은 78년 말 이란의 국내 혼란과 79년 초의 이슬람 혁명을 계기로 다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난다. 

국제 유가 급등으로 막대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인 중동 국가들은 경제개발계획을 실시하고, 정부는 1975년 12월 대중동 진출 촉진 방안을 수립 후 해외 건설과 인력 송출을 지원한다. 건설 무역업을 중심으로 주가는 급등하며 연평균 100%가 넘는 상승을 보이다 6월 말부터 증권거래세 신설과 시가발행제도 도입검토설이 나돌며 가격이 꺾이기 시작했다. 이때 코스피는 1978년 정점 후 2차 오일쇼크와 10.26사태로 1980년 말까지 39%하락하게 된다. 

 

 

4. 1986. 저축대부조합(S&L) 파산사태

 

미국 4,000여 개의 주택대부조합(S&L, Saving&Loans Association) 가운데 부실이 큰 1,043개가 조합이 문을 닫은 금융 위기부동산 시장이 냉각되면서 발생한 사태이다. 1980년대 들어 미국 금융기관의 부실 여신이 늘어나면서 레이건 행정보는 금융기관의 부실 여신이 누적되자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구제금융을 제공했지만 결국 부실한 금융의 파산 기간만 늦출 뿐이었다. 다행히 서브프라임과 같은 파생상품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연쇄적인 도산은 면할 수 있었다. 

당시 국내 코스피 주가1986년 150선에 머물렀는데 8월에 300까지 올랐다가 12월 230선 까지 무너지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989년 4월 1000선까지 상승하게 된다.

 

5. 1997. IMF 구제금융 요청

 

1980~90년대 호황기를 누리던 한국은 90년대에 이르러 경상수지(일정기간 동안 일국이 다른 나라와 행한 경제적 거래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것)가 급감하고 나라빚은 1,500억 달러가 넘어가던 중, 97년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연쇄적인 외환위기는 한국까지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그간 수출 증대를 위해 비교적 쉬운 물가 정책인 고정환율제도를 펼치고 있었고, 당시 김영삼 정부는 OECD에 가입하기 위해 원화가치를 고평가해 국민 소득을 만달러로 유지하고자 환율시장에 개입하면서 다량의 외화를 방출하여 외환보유액이 1년만에 330억에서 204억 달러로 급감한 상황이었다. 뿐만아니라 기업들의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화결국 1997년 12월 ~ 1998년 1월 사이에 약 3,000여 기업을 도산하게 만들었고, 결국 국가부도를 선언하고 1997년 12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대우(당시 재계 4위 그룹), 기아, 쌍용, 해태, 진로, 한보, 심미, 청구, 극동을 포함 30대 대기업 중 17개 업체가 도산하고, 수많은 중소기업이 문을 닫고, 심지어 대학(단국대) 까지 무너지면서 실업자가 단기간에 150만 명까지 늘었다. 1995년도 1200선이었던 지수는 97년 7월 726선,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구)와 구제금융 합의 후인 97년 12월에 400선을 밑돌다가 98년 8월에는 310선 까지 떨어지게 된다. 

그러다 불과 1년반 만에 닷컴 열풍이 불면서 1200수준을 회복한다. 환율이 미친듯이(2,000원) 오르고 집값은 폭락(집값 12.4% 전세금 18%)했다. 당시 사람들은 불안함에 돈을 쓰지 않았고, 시중 은행의 금리는 IMF의 요구로 1년에 20%, 3년에 65%가 되는 상품이 나왔다. 시중에 새마을 금고와 같은 제2금융권의 가장 높았던 금리는 10%대가 있었다.(향후 IMF의 금리 정책은 부정적으로 평가)

 

 

6. 2008. 서브프라임 사태

 

모기지론(mortgage loan)이란 집을 살 때 은행에서 집값의 70~80%를 담보로 돈을 빌리고 천천히 이자와 함께 갚아나가는 부동산 담보 장기주택자금 대출 제도이다. 처음에는 대부분 신용등급이 높은 프라임(Prime, 탄탄한 직업 등으로 대출을 갚을 능력이 충분한 등급) 모기지를 운용하던 은행들이 하위 단계인 서브프라임(Sub-Prime) 모기지 까지 확대하기 시작하면서 위험성이 커지기 시작한다.

은행은 MBS(대출 채권의 증권화)를 투자은행으로 넘기고 파생상품으로 만들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경기 활성화와 부시의 1가구 1주택 정책으로 주택시장의 붐을 일으킨다. 은행을 비롯한 모두가 끝없이 상승할 줄만 알았던 부동산 시장의 버블은 2008년 금리 인상을 시작으로 붕괴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이자를 은행들은 금리 인상분 만큼 받으려 했지만, 안정적이지 못한 서브프라임 등급의 서민들은 그돈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이는 결국 리먼브러더스의 파산과 매릴린치의 매각, AIG 파산 보호 신청 등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은 1990년대 벤처 열풍으로 2007년 처음으로 코스피 2000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1850선이었던 코스피 지수는 프로그램 매도로 5,000억원이 증발하고, 9일 뒤 메릴린치 대규모 모지기 손실로 1780선, 5일 뒤 외국인 사상 두 번째 순매도(1조172억원)로 1700선, 5일 뒤 미국 경기침체 우려 확산으로 1680선, 다음날 미국발 위기로 글로벌 증시 약세로 1600선, 나중에는 820선까지 떨어진다. 당시 미국이 7%가 떨어질 때 유럽은 평균 6%대, 인도는 10%대, 아시아는 평균 7%대 하락했다. 이처럼 미국에 비해 유럽이 받는 영향은 아시아에 비해 적으나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는 미국보다 큰 영향을 받는 편이다. 

 

| 반복되는 주가의 역사

 

주가는 대체로 평균 10년을 주기로 위기를 겪는다. 10년이라는 주기는 일반적인 정부 정책에 따른 경제 발전을 판가름하기 좋은 시기이다. 어딘가에 숨어서 몰래 곪아가던 폐부가 드러나면서 치료되거나 폐기되는 과정을 겪는 것은 지극히 건강한 것이며 꼭 필요한 과정이다. 

세계의 주가는 굵직한 사건인 '포드와 인터넷의 등장, 전쟁' 등으로 큰 상승을 보여주지만, 경제를 쥐고 있는 미국의 정책이나 위기, 석유를 쥐고 있는 중동국가의 정책이나 위기에 의해 하락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같이 예상치 못한 코로나19 같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우리가 대비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과거의 위기를 통해 현실의 대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럼 이번 코로나 사태는 위에 제시한 6가지 사태 중 어디에 적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까?

아마도 먼저, 1번(대공황)과 6번(서브프라임 사태)에 해당하는 기업의 도산과 대량실업, 그리고 3번(오일쇼크)의 석유파동 상황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IMF사태를 적용하지 않는 이유는 IMF는 세계적 유행인 코로나 사태와 달리 한국에만 국한된 일이었으므로 성격을 달리한다고 하겠다. 1번의 대공황 또한 시기적으로 오래되었고, 지금의 경제상황이나 펀더멘탈에 따른 대응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6번, 서브프라임 사태는 단기간에 미국 7%, 아시아 10%의 주가 하락을 안겼으므로,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주가는 일시적으로 10% 선을 유지하면서 오르고 내림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3번의 오일 쇼크를 연결시키면 말은 달라진다. 즉, 일부 종목에서는 40%까지 등락을 예상해야한다. 

주식의 회복 기간은 해당 문제 복구 후에도 1년이 걸렸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의 회복 기간은 치료제가 완성되거나 전염이 끝난 시점 이후의 1년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금융위기와 전염병은 다른 성질의 위기라는 점과 피해 규모를 생각한다면 그 회복시기를 더 앞당길 수도 늦출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시기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점은 바로 경제의 주체인 미국과 유럽의 내일이다. 만약 미국이 완벽하게 코로나를 차단하고 이탈리아 등 유럽이 잘 막아낸다면 더 이상의 추가 하락은 없을 것이다. 세계 경제는 언제까지나 상승하지도 어디까지 내려가지도 않는다. 늘 언제 그랬냐싶게 회복하므로 쉽게 낙담하거나 나쁜 판단과 선택을 할 필요는 없다.

혹시라도 작금의 위기로 나쁜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다시 스크롤을 올려서 위를 보라! 전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주식의 역사는 그냥 단순한 숫자 놀음에 불과한 것을...

지금 유동성이 심한 장은 소위 전문가라 칭하는 자들의 장난질과 자칭 최고라 칭하는 세력들의 한탕질의 암수일 뿐임을 다시한번 상기하길 바라며, 현상을 보는 실수를 거두고 실체를 보는 눈을 갖고 차분히 내가 믿고 투자한 기업의 회복을 의심하지 않으며, 일정기간 정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안전 자산 보유와 함께 건실한 주식 종목으로의 변경을 권하는 바이다. 

 

 

이상으로 '내로라하다'의 주식의 역사

'내일도과거처럼위기는찾아올것이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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